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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 ▒▒▒▒▒/:: 영화 ::

영화 300의 역사왜곡을 알아보자





1. 고대 그리스인들 중 금발에 벽안인 사람이 실제로 존재했을까?








(300에 등장하는 그리스인들, 금빛 머리의 전형적인 게르만 족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 고대 그리스인은 금발에 푸른 눈이 아닌, 흑발에 갈색 피부를 가진 민족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그린 그리스 벽화)

이는 현대 그리스인도 마찬가지다.









(현대의 그리스인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덧붙히자면, 300에서 그리스인을 연기하고 있는 호주 출신 배우, 데이빗 웬헴 (달리오스 )의 조상은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 아무런 문명도 세우지 못한 채 부족 단위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2. 페르시아인(이란인)은 모두 유색인종이었을까?




(레오니다스 왕이 페르시아 사신을 떨어뜨리고 있다.)


(300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사신 役을 맡은 타이론 벤스킨, 그는 영락없는 흑인이다.)

300에서 구멍 속에 떨어져 죽은 페르시아 사신은 흑인이다. 영화 상 다른 페르시아인들 또한 흑인이다. 레오니다스 왕에게 처형당하는 페르시아의 장군 또한 흑인이다. 300은 페르시아의 엘리트들을 흑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페르시아인은 유럽의 게르만족과 한 조상을 둔 아리아인이었으며 그 중 상당수는 금발에 벽안인 백인이었다. 때문에 오늘날 이란에도 금발에 벽안인 사람들이 남아있다.




〈고대 페르시아인〉






(키루스 대제,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로 페르시아 건설한 샤한샤이다. 그는 이란인들에게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져있다.)



(라벤나의 로마시대 벽화에 묘사된 세 동방박사. 이들은 페르시아 복식을 한 이란인을 토대로 그려졌다. 로마인들은 파르티아와 사산인들의 모습을 그려내는데 객관적인 입장을 취했다.)



〈현대 이란인〉





























3. 페르시아는 정말 미개한 야만국이었을까?

페르시아는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비이성적인 야만인들의 나라가 아니었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창시자인 키루스 2세는 세계 최초로 인권의 신성함과 개인의 자유를 공개적으로 천명한 군주였다. 또한 키루스 대제는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는데,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는 이 세상에 '나쁜 민족'이나 '나쁜 종교' 따위는 없다고 가르쳤다.

조로아스터는 모든 선한 것을 대변하는 아후라 마즈다('최고의 천사')라는 전지전능한 신에 대해 설파했다. 하지만, 이 아후라 마즈다를 받아들이냐 마느냐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었으며, 각 민족들에게 강제적인 개종을 강요한 예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키루스 그 자신도 바빌로니아의 신 마르두크(Marduk)의 신상에 복배하며 존경심을 표한 것이다. 선한 이들에게 천상에서의 내세가 기다리고 있으며, 악한 이들에게는 고통스러운 내세가 준비되어 있다는 믿음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군주들이 자신에게 복속된 여러 국가들을 도덕적으로 대하는 태도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스의 군인이자 역사학자였던 크세노폰은 그의 저작 〈퀴로파이디아 에서 키루스 대제를 격찬하면서, 그가 속임수, 오만함, 음흉함, 이기심이 전혀 없다고 서술하였다.

키루스 대제는 세계 최초로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제국으로 포섭하고자 한 통일영웅이다. 그는 서로 다른 언어, 원칙, 율법 모두를 포용하고자 했다. 때문에 알렉산더 대왕은 키루스 대제를 깊이 흠모했고, 333~323 BCE의 페르시아 정복 이후에 이 "통일영웅"의 기치를 내걸었다.

키루스의 정부체제는 '키루스의 원통'을 통해 불멸의 것이 되었다. 이것은 바빌론 정복 직후 538 BCE에 키루스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원통형 토기이다.





(키루스의 원통. 세계 최초의 인권헌장이다. 뉴욕의 UN 청사에는 키루스 원통의 내용을 담고 있는 복사판이 존재하고 있다.)


이 키루스 원통의 3대 전제는 다음과 같다:

(1) 모든 인종, 언어, 종교의 평등함
(2) 추방당한 만민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음
(3) 파괴된 모든 신전은 복구될 것

키루스가 바빌론의 군주 나보니두스를 격파했을 때, 그는 바빌론 유수의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이것은 유대 민족, 종교, 전통과 문화의 존속을 보장한 세계 최초의 선언이다. 키루스는 유대인들이 신전을 재건축 하는 것을 허가했으며 그에 필요한 비용을 대줬다.

페르시아 제국은 다리우스 대제의 치세에 위의 원칙을 답습하여 519~518 BCE에 걸쳐 예루살렘의 대사원을 재건했다 (에즈라 書, 4:1). 키루스의 자비로움은 구약성서에 야훼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에즈라 書)로써 불멸의 것이 된 바, 코레쉬 ('키루스'의 히브리어 발음)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로써 추앙받았다.

이사야는 키루스에 대해 "그는 나의 양치기이니 그가 내 모든 것을 아루리라" (이사야 書, 44.28; 45.1)라고 언급한다. 성서의 인물들인 에즈라, 다니엘, 에스더, 그리고 모르데카이는 모두 페르시아의 궁정에서 중요한 직위를 갖고 있었으며, 에스더와 모르데카이의 묘소가 2,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대인들을 받아들인 고대의 엑바타나 자리였던 하마단에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유대인 에스더는 〈300〉의 주인공인 크세르크세스 왕의 왕비였다.




(고대 이란을 보다 인간적으로 그려낸 1962년도 헐리웃 영화, <크세르크세스>. 이 영화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 역을 리쳐드 에간이 열연했고, 그의 유대인 왕비 에스더 역은 죠안 콜린스가 맡았다.)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부조〉


( 〈300〉의 크세르크세스 1세 )


〈이란의 하마단에 있는 에스더와 모르데카이의 무덤〉

타민족과 타종교를 극심히 배척한-그리고 오늘날에도 배척하는-유대인들이 이교도인 조로아스터교 신자 '키루스 대제'를 알아서 찬양하게 할 정도로 키루스는 수많은 민족과 종교들을 평등하게 대했다.

덧붙히자면, 고대 그리스인 중에서 피타고라스, 플라톤, 탈레스, 데모크리토스 등을 포함한 상당한 수의 학자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바빌론, 이집트, 그리고 페르시스로 유학하여 공부했다. 특히 천문학, 수학, 물리학, 기하학과 신학 등에서 페르시아 학문의 영향은 지대했다.



4. 임모탈 군단에 대해서

임모탈 군단이라는 정예 불사대가 실제로 존재하긴 했으나 영화에 나온 것처럼 괴이한 금속 가면을 쓴 일본 닌자들은 아니었다.




〈300의 임모탈 군단〉




1971년도에 역사학자들이 복원한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 당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군 장교의 모습.〉



〈다리우스 궁전 벽에 묘사된 임모탈 군단. 이들은 왕을 호위하는 최정예 부대였다.



5. 정말 300 vs 백만명의 싸움이었는가?

현대의 학자들은 당시 페르시아 군의 병력을 대부분 10만~2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이것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인구비례에 맞는 수치이다. 설사 페르시아 제국이 170만명을 동원할 수 있는 인구를 갖고 있었다고 해도 현대와 같은 전자장비와 관리설비 없이 170만 병력을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또, 그러한 군대를 실제로 조직해내어 페르시아에서부터 그리스까지 대규모 원정에 오른다고 할지라도 고대의 보급체계로는 그 규모를 부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규모의 병력동원이 가능해지는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인데, 미국 남북전쟁 (1861-1865)의 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전신과 철도의 발명 이후의 일이 된다.

테르모퓔레에서 스파르타인들과 그리스인 연합군의 병력은 6천에 가까웠다. 페르시아군의 규모가 예상 최저치인 4만명에 불과했다고 할지라도 역시 그리스인들은 레오니다스왕의 최후의 항전에 있어서 명백하게 숫적으로 불리했을 것이다.




6. 고대 이란의 여성들에 대해서

300의 이란인 여성들에 대한 묘사는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것은 물론이고, 비단 이란인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여성들에게 모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역사적으로 이란에서의 여성들의 지위에 대한 무지로 인해 퍼진 편견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대 이란의 여성들은 제관, 전사, 지도자, 그리고 교육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역할을 자세하게 파고 드는 것은 힘들지만,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면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기는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다.

로마의 사료에는 사산朝 시대 이란인 기병대에 있는 여성들에 대한 기록이 분명하게 남아있다:



페르시아 군에는 남자들 처럼 옷을 입고 무장한 여성들이 있다…”
[Zonaras (XII, 23, 595, 7-596, 9)]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샤푸르 1세. 왼쪽에 여성 기병장교가 보인다. 그 옆에 수레나스 일족의 귀족이 서있다(높은 모자를 쓴 사람),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무릎을 꿇고 있으며, 그 옆에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 있다. 샤푸르 1세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오른쪽) 〉



이란의 여성들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이후에 7세기에는 우마이야와 압바스조 칼리프군의 침략에 대항하여 저항군을 조직했다. 그 중 주요 인물이었던 아프라닉은 피란 장군의 딸이었으며, 아자데는 북부 이란의 길란-마잔다란 지역 저항군의 지도자였고, 아제르바이젠에서는 反-압바스조 저항군 지도자 바박 쿠람딘의 아내 바누가 남편의 사후 수 십년 동안 저항군을 이끌었다.

이란의 여성들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이후에도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계속 해왔는데, 그 중 하나가 레이의 여총독이다:





레이의 여성 총독 (Farrokh, Elite Sassanian cavalry, 2005, p.60)


이러한 남녀평등의 개념은 조로아스터교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전설에서, 조로아스터는 그의 딸 프레이네의에게 누구를 사귀고 결혼할 것인지는 여자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말해준다.





7. 크세르크세스 1세 당시 스파르타에 대해서


크세르크세스 1세 당시의 스파르타는 20세기의 나치 독일보다 더한 군국주의 국가였다. 이 나라는 막 태어난 아기들이 의사의 검사 하에 나약하다고 판단되면 그대로 산과 들에 내다 버려졌으며 살아남은 아이도 일곱 살이 되는 해에 집을 떠나 병영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또한 30세가 되기 전까지는 결혼도 할 수 없었으며,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병영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자유민들도 이런데 노예들은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을까? 스파르타의 노예들은 가축과도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이 때문에 이들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스파르타에 대한 봉기를 일으켰다.

덧붙히자면, 당시 그리스 정치는 매우 후진적이었다. 그리스를 크세르크세스 1세의 페르시아로부터 구해낸 영웅인 테미스토클레스(300: 제국의 부활에 조연으로 등장한다)는 후일 배신자로 규탄받고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크세르크세스 1세의 후계자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망명지를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8. 끝내면서

마지막으로 짧게 짚고 넘어가보자. '악'한 페르시아인을 그려내는 한 장면에서, 레오니다스 왕은 죽어가는 소년을 품에 안는다. 여기서 소년은 "그들은 어둠으로부터 왔어요..." 라고 말을 한다. 〈300〉에서 페르시아 = 악 임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나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단지 판타지 영화일 뿐이라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판타지'라는 이름 하에 한 민족의 선조를 '변태', '악마', '괴물'로 그려내는 것이 옳은 일인 걸까?

이미 수많은 미디어가 (특히 영어권에서) 이 작품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오늘날 이탈리아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에게 보다는 북미와 유럽권 사람들에게 보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300>은 상업적 성공을 위해 일부러 부정적 감정에 주목한 것이다.


출처 : http://movie.naver.com/movie/bi/mi/reviewread.nhn?code=91192&nid=3126101#tab

3줄 요약
1. 이란에 금발의 백인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페르시아 인종은 아리안 계통>
2. 페르시아는 관용적이고 평등의 가치를 아는 문명국이었다.
3. 300 VS 백만은 허무맹랑, 실제론 몇천 VS 십만정도

결론 : 제작사가 상업적 성공을 위해 서구우월주의적 내용을 부추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