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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 군대 ::

모사드의 천사 : 어둠의 천사 아슈라프 마르완








(메이어 총리(우)와 다얀 국방장관(중앙))











수에즈 운하에 집결해 있던이집트 군 포병전력의 선제공격으로

4차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욤 키푸루 전쟁이 발발하였다.




아만의 수뇌부는 천사의 첩보가 잘못되었다며 따졌다.


첩보엔 이집트군의 공세는 EENT가 다 되어서야 이루어 질 것이라 하였지만

실제로는 오후 2시경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천사의 첩보를 믿지 못했던 아까와는 다른 모습이였다.



훗날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천사의 첩보가 빗나간 이유는

H-hour를 앞두고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아랍 연맹국들 간의

긴급회의를 통해 개전시간을 앞당겼기 때문이다.



이 때 천사는 런던 행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어찌됐든 전쟁은 시작이 되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우선 코 앞의 불부터 꺼야 했다.




개전초기 수에즈 운하를 방어하고 있던이스라엘군은 비록 열세인 병력이였지만

그래도 지원군이 올 때 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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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브 모래장벽 때문이다.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를 따라 요새화 작업을 진행하면서,

구축한 일종의 방어진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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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브 장벽에 주둔하던 M60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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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브 장벽 구축 당시모습)





적의 도하를 거부하고이와 동시에 장벽 뒤에서 도하하는

적 병력에 대한 지상대화력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스라엘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군을 막을 수 있을꺼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이집트는 이번 전쟁을 결코 대충 준비하지 않았다.

소방호스를 이용하여 고압의 물을 쏘아 바-레브 장벽을 단 두 시간만에 파괴하고

병력을 수에즈 운하에 도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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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압의 물을 쏘아 모래를 무너트리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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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장벽을 향해 도하하는 이집트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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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운하를 도하하는 이집트군)







천사의 말처럼 EENT가 되기 전 수에즈 운하를 도하한 것이다.

이스라엘 군은 수에즈 운하를 잃고 시나이 반도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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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추 당하는 이스라엘 공군의 미라지3)






이후 10월 8일에 이스라엘군의 반격이 있었지만

이집트군의 대전차화기와 방공망에 의해

기갑전력 및 항공전력이 큰 피해를 입고 반격을 멈추고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또 이스라엘 동쪽으로는 시리아 군이 진격을 하여

골란고원까지 병력을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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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시리아 골란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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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집트 시나이 반도)





이로써 이스라엘은 개전 48시간만에

수에즈 운하를 잃고시나이 반도골란고원 일부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이스라엘은 심각한 난관에 가로막혔다.

-서 양쪽에서 병력들이 밀어닥쳐오고 있었으며,

이집트와 시리아는 주변 아랍국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천사로부터 첩보가 건너왔다.


더 이상 이집트군의 스커드 미상일 공격을 없을 것.

이집트군은 더 이상 전선확장을 하지 않고 방어를 하며 전서고착화를 유지할 것


이스라엘군은 일단 천사의 첩보대로 이집트 군과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나이 반도보다는 당장 이스라엘로 진격 할 수 있는 골란고원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10월 8일경

이스라엘은 현재 가용 할 수 있는 모든 예비병력을 끌어 골란고원에 투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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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란고원 전투)






골란고원은 이미 아비규환의 상황이였다.



H-hour가 선포된 10월 6일경

골란 고원엔 190여대의 이스라엘 전차부대만이 있었으며,

이에 공세를 가하는 시라아군은 1300여대의 전차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10월 6일 14:00


훗날 전차전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되는 골란 고원 방어전이 개시되었다.

최초 공세는 9:1의 수적 우세를 앞세운 시리아군이 주도하였다.

수적 열세에 몰린 이스라엘군은 우세한 병력교환비를 유지하며 교전을 이어갔지만

개전 6시간 후 공세종말점이 다가 온 이스라엘 군은 후퇴하기로 하였다.

이스라엘 공군에게 항공지원을 요청하였지만시리아 군의 방공전력에 의해

40여대 이상의 항공기가 격추되었으며시리아 군에게 입힌 피해는 전무하였다.

골란고원을 방어하던 이스라엘 군은 항공전력의 지원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시리아군의 전차엔 야투장비가 장착되어 있었으며,

보병들은 대전차화기를 가지고 전선 여기저기서 거부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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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센츄리온 전차)





전투는 주야간 계속 진행되어 왔으며압도적인 수적 열세로 인하여

이스라엘군의 전력소모는 극심해졌다.

골란고원에서의 이러한 전선 상황은 북부와 남부에서 모두 시리아군에게 유리하였다.

북부와 남부 모두 지휘관이 전사하여지휘부가 붕괴된 상황 속에서도

생존한 10대 이하의 전차들만이 남아 끝까지 방어전을 펼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골란고원의 북부와 남부에서 많은 영웅들이 나왔는데

그중 도드라지는 군인이 있었다.

바로 골란고원 남부전선에 투입되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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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비카 그린골드(Zvika Greengold).




21세의 중위였던 그는 50:1의 수적 열세 속에서도 분전하였다.

6번이나 전차를 갈아타면서 방어전을 수행하였다.

훗날 그는 Medal of Valor를 수여받게 된다.


10월 8일경 골란고원에 이스라엘의 증원군이 투입되면서

골란고원 방어전은 끝이 났다.

보충된 이스라엘군은 골란고원에서 시리아군의 돌파를 거부하였고

시리아 군은 결국 후퇴하게 된다.

개전 100시간이 지나면서 전쟁은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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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시리아 전쟁 추이

이스라엘 군의 진출선이 확장된 것을 볼 수 있다.(우))





우선 동부전선에서 골란고원 방어를 성공한 이스라엘군은

10월 10일경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시리아군을 격파하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앞까지 진격하게 된다.



서부전선에선 이스라엘군이 역으로 수에즈 운하의 도하를 성공하여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군을 고립시킨다.

공세의 양상은 이제 이스라엘에게 넘어갔다.


10월 23일 미,소의 중재로 인하여 전쟁은 끝이났다.

비록 이스라엘이 승리하였지만 그 피해는 적지 않았다.

2700여명이 사망하였고, 7200여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전쟁은 끝났고 이제 전후 복구와 그 책임을 물을때가 왔다.


책임의 화살은 당연히


천사의 첩보내용에 반대하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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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라 국장(좌), 엘아자르 참모총장(우))




아만의 제이라 국장과 IDF의 참모총장 이였던 다비드 엘아자르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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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몬 아그라나트 (Shimon Agranat))


이스라엘 대법원의 시몬 아그라나트 판사가 주재하는 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당시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련의 과정들을 다시 재조사하기 시작하였고

제이라 국장과 엘아자르 참모총장은 옷을 벗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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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르 국장)




모사드의 자미르 국장은 영웅으로 칭송 받으며퇴임을 하였다.


모든 일은 이렇게 끝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불명예스럽게 퇴임한 제이라 전 국장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1973년 당시 있었던 일을 책을 써 내었다.

2004년 그의 책이 출간되었다.


그는 천사가 이중스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자신이 전쟁준비에 반대를 하였다는 것 이였다.


하지만 이중스파이라고 보기엔 천사의 첩보는 100%의 정확도를 가졌다.

이스라엘이 천사로 인해 정보전에서 피해를 입은 적도 없었다.


여론은 들끓었다.


제이라 전 국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천사의 이름을 공개하였다.



우리가 천사로 불렀던 공작원은 바로 아슈라프 마르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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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슈라프 마르완(ashraf marwan))





그의 발언은 곧 엄청난 후폭풍을 몰아왔다.


아슈라프 마르완은 바로 전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30년 넘게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던 즈마르 전 모사드 국장이 공개적으로

제이라 전 국장을 비난하였다.


제이라는 반역자이며국가기밀을 누설한 파렴치한이라고 독설을 쏟아내었다.

지금껏 정보원의 신원을 밝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심지어 그 정보원이 살아있을 때 밝히는 일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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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마르 전 국장)




즈마르는 훗날 인터뷰에서 마르완에게 연락을 취해보았지만

마르완이 연락을 거부하였다고 했다.


즈마르는 마르완이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았다고 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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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세르 대통령(좌), 마르완(우))




아슈라프 마르완은 나세르 대통령의 셋째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장인어른의 힘을 빌어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1969년 25살의 마르완은 화학으로 학위를 취득하고,

런던으로 건너가 계속 공부를 하였다.


1970년대의 런던은 그에게 천국과도 같았다.

장인어른의 재력으로 그는 매일 밤 향락에 빠진 생활을 하였고

심지어는 바람도 피웠다.


대통령 사위의 이러한 사치와 방탕한 생활이 그리 오래갈리 없었다.

부인이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어 그는 강제귀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업무 차 런던을 가는 것이 아닌 이상 그는 이집트를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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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에 제약이 생기고경제적 지원이 끊어지자 마르완은 분노했다.


업무로 인해 런던에 오게 된 마르완은 이스라엘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정보업무 담당자를 바꿔달라고 요청하였다.


물론거절당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대며이제부터 그쪽과 일을 하겠다하였지만

대사관측은 그의 이름만 건네 받았을 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마르완은 한 번 더 전화하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마르완에게 연락이 온 곳은 대사관이 아닌 모사드였다.


Tzomet team의 담당관였던 시무엘 고렌(Shmuel Goren)

마르완의 이런 행동을 놓치지 않고그에게 접근 하였다.

(* Tzomet : 모사드의 인사업무 담당부서)

그리고 마르완은 모사드의 첩보원이 되었다.

모사드는 그의 첩보를 비싼가격에 구입하였고

마르완은 항상 그에 해당하는 고급정보를 넘겨주었다.



나세르 대통령이 사망하고 사다트 대통령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마르완은 사다트 대통령을 도우며그의 최측근이 되었다.

이제 마르완은 이집트의 중심에 있으면서 동시에

첩자가 된 상태였다.


마르완과 거래하는 정보국은 모사드 뿐만이 아니였다.

이탈리아 정보국과 영국의 MI6 와도 거래를 하였고

CIA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또한 이집트의 중심에서 중동의 다른 아랍국들과의 친선관계도 유지시켰다.

리비아의 카다피에겐 고가의 선물을 받기도 하였다.


어둠 속에서 그의 영향력과 부는 날로 커져만 갔다.

마르완의 공식적인 간첩활동은 제4차 중동전쟁 이후

기록되지 않았다.

즈마르 국장을 비롯 자신과 함께 일하였던 정보국 인사들이 세대교체 되면서

자연스럽게 본인 또한 활동을 멈추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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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라 전 국장)





2004년 제이라 전 아만국장이 천사의 존재를 폭로하면서

상황은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제이라는 천사는 마르완이 였으며마르완은 이중스파이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이스라엘 매스컴을 타고 전세계로 보도되었다.

이 소식은 당연히 이집트에게까지 흘러 들어갔다.

당시 이집트의 대통령이였던무바라크 대통령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근거없는 헛소리라며 일축했다.

제이라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즈마르 국장을 상대로

두 번의 법정 공방을 벌였다.

그러던 2007년 6월 12

이스라엘 법정은 즈마르 전 모사드 국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슈라프 마르완은 이중 스파이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또 다른 상황을 야기 시켰는데,

아슈라프 마르완이 이중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스파이가 맞다는 소리가 되는 것.

이집트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들의 고위급 인사가 이스라엘의 첩자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마르완의 재판이 끝나고 2주가 지난

2007년 6월 27

런던에 위치한 자신의 고급 자택에서

마르완은 숨진 채 발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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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완의 부인은 이스라엘이 죽인 것이라며분노했고

모사드는 제이라 전 국장의 경솔한 행동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 비난 했다.

이집트 정부는 이스라엘 정부에 유감을 표했다.

상호간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이 사건은 결국

런던 경찰청의 조사결과

미해결로 남게 되었다.





출처 :


The Truth About Israel's Egyptian Agent - http://www.haaretz.com

who killed 20th centurys greatest spy? - http://www.theguardian.com

The 1973 Arab Israeli War http://orionift-history.tripo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