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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서경천도


이 사건을 그저 학교다닐 때 "우왕 고려가 금나라를 치고 황제를 칭하려 했다니 패기 짱짱맨!" 정도로만 이해했던 사람들은

위의 글을 보고 우리의 근시안적 역사관을 짚어준 새로운? 접근법인가? 라는 생각에 기존의 역사관을 반성할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위 글 역시 오십보 백보 수준의 근시안적 시각에서 멋대로 써내린 수준.


일베에 어중이 떠중이 역사쟁이들이 너무 많아 그릇된 역사관이나 팩트없는 선동글은 이루 다 셀 수도 없을 지경인데

이 글도 이미 300베넘게 받은 글인데 관심 분야이고 또 어려운 부분이라 시간내서 이렇게 글을 써 보려함.



물론 방대한 내용을 이 글 하나에 전부 정리 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간추려서 뽑아내보겠다.


글쓴이에 대한 개인적 감정은 없음을 밝히는 바임.





일단


이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고려사회와 국가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① 고려 건국의 주체와 지방 세력간 관계,

② 서경과 고구려 계승의식, 그리고

 신법 등이다.


간단하게 설명하고 가자면



-{ 후삼국은 호족시대라 여겨질 만큼 전국 각지에 크고 작은 군웅호족들이 난무하던 시기였으며 후삼국을 평정한 왕건 역시 대호족 출신이었음.


고려 건국의 주체는 왕건을 필두로한 패서의 호족들로, 궁예의 태봉 정권에서도 국가의 주축을 담당하던 세력들이었고 쿠데타에 의해

고려가 건국되자 이들은 명실상부 건국 주체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삼국 통일 이 후 고려에는 건국 주체 vs 통일 주체의

내부 갈등이 생기는데, 백제계의 경우 진출이 제한 되어있었지만 신라계는 나라를 바쳐 고려에 평화적으로 흡수 되었고

고려와 신라의 왕실간은 결혼 동맹을 맺었기 떄문에 자연스레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게 된 것.


이들은 성장하여 중앙의 귀족으로 자리잡게 되고 이 것이 개경문벌귀족의 모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이분법적으로 나누기에는 곤란한건 인정.




평.jpg


6대 성종조 부터 신라계의 중앙 정계 진출은 더욱 활발했다. (기존 호족들의 모가지가 광종에 의해 싸그리 날라갔으니..)

그러나 고려는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계승국이었고 사실 국호도 같다. (장수왕 이 후 고구려의 국호는 고려임.)


서경은 곧 고구려를 상징했다.


현종대에는 개경과 같이 황제가 거하는 성인 황성을 쌓았다. 유수 아래 분사라고 하여 개경 정부와 같은 행정체제를 마련하고

이부와 병부의 장관까지 따로 두었으니 서경은 하나의 작은 총독부와도 같다고 보면 된다.


결코 서경이 갖는 위상을 무시 할 수 없었기에, 서경파는 명분이란 것을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명분만 가지고는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 정치판.


이 곳 서경인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중앙 정계 진출이 어려웠다.

그런 특별한 경우에는 반짝하고 다시 토사구팽 되고를 반복 했다.


서경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서경세력은 지속적으로 국왕과 유대하고자 하였고 개경세력은 견제 하고자 했는데.

이것을 절묘하게 이용한 것이 인종의 척준경 제거였으며 그로 인해 서경 세력은 다시 한번 급부상 했던 것이다. }




고려 사회에서의 서경이 갖는 의미와 위상을 간단히 짚었으니 본론으로 넘어가자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 아니라 서경전쟁이다.







1. 신채호는 서경천도운동의 첫번째 인물로 묘청이 아닌 윤언이를 꼽았다.



윤언이가 누군지 잘 모르는 이들이 많을텐데 윤언이는 윤관의 아들로 여진정벌 당시에 활약한 영웅이다.


이 부분 지식은 생소할 듯 하니 먼저 인물 분석부터 해보자.


물론 당시 묘청이 종교 지도자로서, 무한한 추앙을 받고있었음은 분명하다.

스스로를 천자의 스승으로 또는 석가의 부친으로 설정했으니 종교적으로 봤을 떄는 무한한 권위를 지녔음이다.


허나 정치지도자로서의 묘청은 의뭉스럽기를 넘어서 너무나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데..

교과서에서 본 서경천도 운동을 떠올리며 그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을 지 모르나 사실 그는 서경파의 얼굴마담 정도의 위상이 있을 뿐

실질적인 지휘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서경 천도 운동의 지휘권은 유참이나 조광같은 자들이 쥐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



묘.jpg



자 그럼 윤언이는 어떤 인물인가. 먼저 윤언이는 신법의 계승자다.


왕안석의 신법은 알아도 윤관과 의천의 신법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텐데 신법을 간단히 정의하자면

그저 송나라의 신법과 마찬가지로 부국강병책이다. 문종대의 전성기를 이어가기 위한 거대한 개혁으로 대각국사 의천과 윤관,

그리고 숙종이 추진 하였으며 별무반 창설과 화폐개혁 등이 신법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중앙귀족들의 입장은 달랐다. 대게 나라가 풍성하고 살만하다면 부국강병 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기를 원한다.


지금의 우리가 그렇듯.


현재 한국에는 당장 기득권이 아니더라도 북한과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왜?? 지금도 먹고 살만하니까. 나라의 존망이 걸리지 않은 이상 그들(귀족)은 결코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


윤관은 건국공신의 후손이었지만 귀족은 아니었다. 그는 자수성가형 인물 이었으며 당대를 대표하는 개혁가였다.








비.jpg해동.jpg숙종 때 해동통보



이쯤 읽어보면 눈치 빠른 게이들은 왜 신채호가 윤언이를 서경세력의 선두주자로 꼽았는지 알겠지? . 다음으로 넘어가서 계속 보자










2. 윤언이가 금나라 정벌을 주도했던 필연적 이유.




이런 소리는 어리둥절 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윤언이와 서경파는 고려의 민심을 읽고 행동했던 것이다. 민심은 천심이라 했다.


' 읭? 이게 무슨 미친소리람 전쟁이 끝났으니까 고려의 백성들은 환호를 했을게 아니여?' 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우리들의 근시안적인 단정일 뿐. 당시의 민심은 여진을 정벌하여 평정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여진정벌은 국지전이 아닌 국운을 걸고 나라의 총력을 동원한 거국적 대원정이었기 떄문이다.


발사된 총알은 멈출 수 없는 이치다.



싸.jpg




조정의 관료들은 바보가 아니다.




현재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볼 떄 비록 어이없고 멍청한 판단을 했다.. 그렇게 보여지는 기록일지라도

나름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과 지식인들이 머리를 쥐어짜서 내놓은 결과물이라는 것


당시 문벌귀족들 입장에서 여진정벌은 국왕의 권위가 비대해지고 서경파의 세력이 비대해지는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었다.

정치적 이해는 둘째 치더라도 당장 그들의 자식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기적라는 개경의 문벌귀족들이

일치단결하여 여진정벌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만큼 당시의 상황이 긴박했던 것을 중앙 귀족들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려에게 있어 동여진의 상실은 치명적이었다. 여진을 잃는다면 고려의 천하관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나라가 망하면 권위도 권력도 없다.






군.jpg신기.jpg신기군 기마병



백번양보해서 전쟁에 동원된 백성들은 강제로 징집되었다 치더라도 그 후 이야기는 다른 문제다.

이들은 몇년간 특별훈련을 받은 용사들이었다. 별무반을 무슨 변방수비대 정도로 생각하면 정말 곤란하다.


뜻에서 볼 수 있듯 특별히 조직된 특수 무력 단체였고 전날의 패전과 치욕을 씻기 위한 사명을 띈 강력하고 신성한 군대였다.

(신기군의 신, 신보군의 신자 역시 모두  이다.) - 별무반의 편제와 분석도 추가하고 싶지만 글이 너무 난잡해질 듯 하니 생략함.-



대 전쟁이 끝나고 비록 금국이 고려의 군사력을 무시하지 못하여 서로 간 충돌을 피했다지만

강자의 논리란 항상 제 멋대로인 것이다. 고려와 거란이 여진에게 그랬고 이제 강국이 된 여진이 고려에게 그러했다.


9성은 반환됐고 고려는 금나라의 신하로 전락해 버렸다.





지도.jpg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별무반의 수십만 용사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던 것일까?

라는 회의감이 스스로 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중에는 노모를 부양하는 가장도 있었다.




다음은 여진전쟁에 지원했던 민영의 묘지명 내용 중 일부이다.


「마침내 예종께서 동쪽의 오랑캐를 정벌할 기회를 만나자, 간청하여 신기군이 되었다...

... 매번 선봉이 되어 말을 타고 돌진하여 적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전쟁에 신념과 열정 그리고 혼신을 불태운 용사가 비단 민영 뿐은 아닐 것이다.




여진전쟁은 고려의 거의 모든 장정들을 가리지 않고 징집하여 추진했던 국운을 건 대 사업이었으며


'이런 꼴을 보자고 전우들이 목이 잘리고 적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슬픔을 감수하면서 그토록 혼신을 다해 싸웠는가'

'비록 죽을 지언정 본인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그 간 무엇을 했는가?'


이게 곧 당시 고려의 민심이었다.



윤언이는 그러한 여론의 중심에 서있었고 서경파는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3. 서경 천도 운동은 권력을 잡기 위한 묘청과 서경세력의 사기극이다?



서경에 대화궁이 건설됐다.

(불과 4개월이라는 초단기간에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궁은 중국 자금성의 대략 4/5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만큼 국가의 총력을 기울였다.)


: 자금성 72만M² VS 대화궁 55만M²


국왕 인종이 서경세력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정지상이 ,

여진 전쟁의 영웅 윤관의 아들 윤언이가 중심이었다.


심지어 오늘날로 치면 서울대학생인 국자감생들 마저 칭제건원과 금국정벌을 주장하며 들고일어났다.


" 고려는 애초에 황제국 체제의 나라였다. 고려 사회에서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세움을 주장하는 것은 다원적 공존의 천하가 아닌

중화를 포함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 위에 군림하는 그런 천하의 주인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어차피 독자천하관이 무너진 마당에 전부다 쓸어 버리자는 답답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


서경천도 운동은 결코 민심을 뒤로한 어거지 사업이아니었다.




북한이 공개한 대화궁 규모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498332



화.jpg대.jpg




서경파의 부상이 인종이 신하들의 충성심을 유도하고 권력 향상을 도모했음과 함께

입지 향상을 위한 서경 세력 간 아구가 맞았다고 보는 것은 틀리지 않은 분석이다.


그러나 ...

단순히 그런 맥락에서만 보고 글을 쓰는 것은 너무나 경솔하고 선동적이라는 것이지


위에 말했 듯 대금정벌이나 칭제건원등은 서경파의 어거지가 아니라 국왕의 어의와 민심이 동반된 것이었다. 여진정벌은국운을 건 대전쟁이었다.

여진정벌은 대국민적 사업이고 모든 관민이 일치단결해서 수행했던 전쟁인 만큼 국가적 총력을 기울였으며 인종은 수시로 국제 정세를 살폈다.


여차하면 처들어가려고 어디를? 금나라지 어디야



전.jpg

그와중에 서경파에는 최봉심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신에게 장사 1천명만 준다면 가서 금나라 왕의 목을 가져오겠나이다' 
라고 했을 정도로 과격파이자 금국 정벌의 의지가 강했던 사람인데

개경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이런 최봉심을 금나라의 사절단으로 보냈다.
금나라를 정벌하기위해서는 정보 수집이 필요했던 것.


윤언이는 비록 자기 손으로 서경반란을 진압하지만, 김부식이 죽은 뒤 다시 군권을 장악했고
금나라를 치기 위해 20만의 군대를 양성하기도 했다 (윤언이 묘지명 참고)

얼마 후 그는 비록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일생의 꿈을 , 아버지의 대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숨을 거뒀지만

이러한 모든 행위가 일련의 정치적 쇼이자 사기라고 보는 것은 당시의 인심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경솔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금국 정벌론은 마침내 신법론자 VS 구법론자,

고구려 계승론자 VS 신라 계승론자 간 갈등이 폭발한 것이니


전자는 서경파요 후자는 개경 문벌귀족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부분 관련 도서로는 <<윤관과 묘청 천하를 꿈꾸다 >> 추천.

아니면 일베에 예전에 여진전쟁 관련 올라온 글도 있더라 ->http://www.ilbe.com/1316308155






- 그렇다면 필자는 금나라 정벌이 가능했다고 보는가? -


{{ 이건 또 별개의 문제이다. 당시 금국 정벌이 사실 쉬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비록 고려가 건국 직전의 여진을

수십만 강병으로 도륙하였다지만 이 때의 금은 승승장구하여 이미 중원을 제패했으니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 말했듯 훈련과 실전 그리고 신념으로 다져진 별무반의 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민심은 천심이라 했다. 역사에는 불리한 조건 속에 승리를 거둔 사례가 많이 있다. 고려는 금에 비해 결코 군사적으로 열세는 아니었다.

뛰어난 지휘관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국제 관계에서 고립된 나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민심이 외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하여 본다면 남송과의 연합을 통해 금을 정벌하는 것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 시대에 살았다면 윤언이의 이상을 따르지 않았을까 싶다. }}





다만 서경파는 너무 급했다. 그들은 민심은 파악했지만 민심과 하나되지 못하였고

윤언이등의 전쟁영웅 또는 신법론자들과의 연계가 부족했다. (윤언이는 대금정벌의 대표자였지만 서경천도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미숙하고 성급했기에 결국 윤언이와 김부식에 의해 진압당할 수 밖에 없는 반란에 그치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윤언이의 정치적 입지도 매우 위축된다. 개인적으로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오해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김부식 또한 걸출한 위인이다. 김부식 얘기는 여기서 더 안쓸게




일게이들 읽기엔 좀 어려운 수준일 수도 있지만 관심있던 사람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는 정보글이 되었길 바란다.





마.jpg



3줄 요약.


1. 묘청이 아니라 윤언이다. 서경천도 운동은 생각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2. 고려의 지배 세력간의 갈등 관계와 국제상황을 잘 분석해야 이해 할 수 있다.

3. 신채호? 당대 관료들?


적어도 우리보다 훨씬 더 공부 많이 한 당시의 천재와 엘리트 들이니 경솔하게 까내리지 말자 마치 이건 좌좀이 박근혜 무식하다고 까는 것과 같은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