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신화의 기적을 일궈낸 2002년 한일 월드컵. 온 국민이 붉은 셔츠를 입고 하나가 되어 즐기게 해준 성대한 축제였다.
물론 우리 슨상님께선 월드컵 기간 도중에 교전으로 인해 군인들이 죽어나가도 쉬쉬하기 바빴지만.
어쨌든 이런 성공적인 월드컵을 간혹 '슨상님이 대통령이었을적 주최한거니께, 당연히 슨상님 업적이 맞당께?' 라며 좆질하는 홍어들이 간간히 보여서
2002년 월드컵의 유치 과정과 이 과정의 중심에 있었던 정몽준의 행적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우선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 예선까지 올라가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시 아시아 예선을 3개월정도 남겨놓은 상태에서 일본은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범국가적인 지원에 힘입어 월드컵 유치활동을 진행해 나가는 상태였고, 또한 아시아 예선을 무난히 통과할 정도로 일본 국대전력이 탄탄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월드컵에 대해 관심도가 매우 떨어진 상태였고, 아시아 예선 준비 또한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는 만약 한국이 월드컵 유치활동을 할 때,
심각한 결격사유가 될 수 있었는데 월드컵 예선도 통과하지 못하는 국가가 월드컵을 유치하는 것은 아무래도 심사때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에 평소 축구에 관심이 많던 정몽준은 만약 다음 아시아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한국이 유치를 못하게 된다면 상당한 기간동안 월드컵 유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래서 정몽준은 직접 한국의 월드컵 유치를 위한 대장정에 오르게 된다.
월드컵 유치의 초석이 되는 아시아 예선을 다행히 이라크가 일본을 무승부로 비기게 되면서 한국이 극적으로 통과하게 되자, 월드컵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상당히 증가하였다. 이에 정몽준은 본격적인 유치활동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월드컵 예선전이 끝나고, FIFA 관계자와 접촉하기 위해 조 추첨식이 열리는
라스베가스로 향했다. 그러나 FIFA 관련 인맥이 전혀 없었던 정몽준은 허탕을 치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정몽준은 월드컵 유치를 위해선 FIFA 조직을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직접 그 조직을 뚫어보리라 결심했다.
마침 1994 월드컵이 열리기 2달전, FIFA에서 아시아축구연맹을 대표하는 부회장을 뽑는 선거가 있었다. 정몽준은 우선 이 선거에 당선이 되어 FIFA에 접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축구 관계자들은 FIFA와 연고가 없던 정몽준의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정몽준이 말했다.
"월드컵 유치와 FIFA 부회장 선거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요?"
"그야 월드컵 유치가 더 어렵겠죠."
"월드컵 유치를 목표로 하는 우리가 FIFA 부회장도 못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속이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우선 쉬운 일부터 합시다. 만약 그것이 안된다면
그 때 가서 정부에 월드컵 유치를 다시 생각해보자고 해도 늦지 않습니다."
정몽준은 필사적으로 요르단, 이라크, 예멘, 몰디브, 네팔 등 아시아 회원국들을 찾아다니며 선거운동을 전개했고 그 결과 11:10 으로 쿠웨이트 후보를
간신히 제치고 FIFA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한면 당선을 자신하고 다니던 일본대표는 2표에 그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FIFA 부회장이라는 자리에 오른지 1년 째되는 1995년 5월, 취리히에서 열린 FIFA 회의에서 2002년 월드컵 개최국의 조기결정에 관한 내용이 의제로 올라왔다.
정몽준은 만약 2002년 월드컵 개최국의 조기결정이 실행된다면 비교적 준비가 부족한 한국이 일본에 밀릴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에 정몽준은 당시 FIFA 회장이었던 아벨란제 회장에게 조기결정에 대해 항의를 하게된다.
"조기 결정은 공정치 못합니다. 이것은 마치 90분간 경기하기로 약속해놓고 전반전을 우세하게 끝낸 팀이 후반전을 하지 않고 끝내자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추가적으로 유럽연맹 회장과 아프리카 연맹 회장이 FIFA 회장에게 조직 운영에 있어 투명하고 공정한 운영을 바란다는 공개 서한을 보냄에 따라
정몽준의 주장은 더욱 힘을 얻게 된다. 결국 그 해 가을 취리히에서 열린 5인 비상위원회에서 개최지 조기결정 안건은 공식적으로 취소가 된다.
여담으로, 조기결정 안건이 상정된 소식을 듣고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일본으로 찾아가 월드컵 공동개최를 제안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고 한다.
1996년, 6월 1일 투표일을 한달정도 남겨놓고 한국에는 갑자기 2002년 월드컵 유치에 대한 비관론이 휩쓸기 시작했다. 많은 국민이 한국이 일본에 비해
상당히 불리하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정몽준은 비관론을 잠재우기 위해서 세계 곳곳을 순방하면서 개최국 유치 집행위원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 결과, 13 대 8 정도의 표로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개최국으로 선정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그러나 5월 초 유럽축구연맹은 제네바에서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한국과 일본이 2002년 월드컵을 공동으로 개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또한 이례적으로 8명의 FIFA 집행위원 전원이 그 결의안에 모두 동의를 하게된다.
정몽준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일본과 양자대결을 벌이면 충분한 승산이 있었는데, 유럽축구연맹으로 인해 공동개최로 결정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FIFA가 변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유럽축구연맹과 진작부터 뜻을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반대할 명분이 서질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공동개최안을 받아들이게 되고, 일본 또한 처음에는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블래터 FIFA 사무총장의 설득으로 인해 결국 납득하게된다.
이로써 일본은 5년, 우리나라는 2년 반에 걸친 유치활동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가던 2002 월드컵 개최국 활동에 제동을 걸고, 공동 개최라는 결실을 얻게 된것은 한국에 정몽준이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나라가 좀 더 일찍, 좀 더 많이 개최국 유치활동에 관심이 있었더라면 단독 개최까지 이끌어낼 수 있었을 텐데, 이점은 상당히 아쉽다.
한마디로 김대중 개새끼는 2002년 월드컵 유치 자체에 손하나 까딱도 안한 새끼다. 그나마 공이 있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마치 월드컵 공동개최를 김대중 업적이라고 선동하고 다니는 새끼들을 보면 썩은 홍어내 맡듯 오만상이 찌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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