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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제 이야기.HISTORY (下) 4142.476

일단 처음 쓰는 글인데 ㅇㅂ가서 놀랐다. 생각보다 관심이 많아보여 나도 기분이좋다. ㅎㅎ

늦었지만 2편 쓸게.

지난 시간에는 필리핀 해 해전에 대해서 이야기했어.

주제가 가미카제인데도 불구하고 왜 필리핀 해 해전에 대해서 알아봤을까? 이유도 모르고 재밌게 읽어준 게이들 많을거야.

(사실 필리핀 해 해전 하나만 세부적으로 다룬다면 그것도 엄청난 분량이다. 이 글은 가미카제가 주제이기에 비교적 간략하게 다룬거야.)

그것은 필리핀 해 해전과 가미카제가 어떠한 연관성이 있어서겠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가미카제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해.

가미카제의 탄생과 전과

일본군 수뇌부는 필리핀 해 해전의 결과를 보고 받아. 그리고 엄청난 충격에 빠지지.

충격 받을게 당연한 것이 그 어느 떄보다 큰 규모로 공격을 감행했음에도 피해조차 주지 못했잖아?

이제 일본군 수뇌부는 중요한 한가지를 서서히 깨닫고 있었어.

'이제 정상적인 항공 공격으로는 미군 함대에 타격을 주는게 힘들어졌구나.. ㅅㅂ'

바로 이 생각이 가미카제 탄생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사실 가미카제가 등장하는 것은 시간이 좀 더 흐르고였어.

필리핀 해 해전 이후로도 타이완 항공전 같은 대규모 전투는 계속 되었지만, 그 전개는 필리핀 해 해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

나는 대표적으로 필리핀 해 해전을 예로 든 것 뿐이야.

역사에 있어서 최초로 공식적인 가미카제 부대가 편성된 것은 1944년 10월 20일이야. 필리핀 해 해전이 대패로 끝난지 대략 4개월 후지.

당시에 일본 해군의 제1 항공 함대는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었어.

참고로 이 때의 1 항공 함대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싸운 일본군의 1 항공 함대랑은 사실 다른 부대라고 생각하면 되.

항모 함대는 해체되고, 말만 함대일뿐 사실 지상 비행장에서 항공기를 굴리고 있었지. (불쌍한 일본군을 살)

그리고 이 시기의 1 항공 함대의 사령관은 오니시 다키지로 제독이 부임해있었어.

1 항공 함대는 얼마전에 발생한 타이완 항공전으로 필리핀 해 해전에 이어 다시 한번 대다수의 전력을 잃어버리고 천천히 재건중이었지.

1 항공 함대의 지휘부에는 절망적인 분위기가 깔려있었어.

오니시 제독이 참모들과 함께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바로 문제의 발언이 나와.

보다 못한 작전 참모 사사이 중좌가 한 마디 한 것이지.

"250kg 폭탄을 탑재한 레이센(제로센) 전투기가 적 항모의 비행 갑판에 직접 충돌한다면, 적 항모의 비행 갑판을 마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발언은 즉시 다른 참모나 항공대 지휘관들의 극딜을 받아. 이때까지만 해도 이성줄을 잡고 있던 일본군이 거부감을 느낀거지.

하지만 잠자코 듣고 있던 사령관인 오니시 제독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작전을 추진하도록 명령해.

그는 누구보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전해져. 스스로 역사에 오명을 남길 각오가 되어있다고 말하고는 했지.

결국 작전에 투입될 조종사들이 선발되었고, 세키 유키오 대위를 포함한 5명이 자원하여 5기의 레이센으로 이루어진 결사대가 편성돼.

이들은 모두 실력있는 베테랑 조종사들이었다.

이게 바로 최초의 가미카제야.




▲ 이 양반이 가미카제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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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최초의 가미카제를 이끌었던 세키 유키오 대위야. 딱 봐도 베테랑처럼 생겼노?

여담으로 이 사진은 당시 많은 일본 여고생들의 마음을 훔쳤다고 해.

때는 10월 25일, 미군은 필리핀 진공을 시도했고, 이를 막기위해 일본 해군의 잔존 전력이 총출동했어.

그에 따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인 레이테 만 해전이 진행되고 있었어. (이 해전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을거야. ㅠㅠ)

이 날, 세키 대위가 이끄는 전투기 5기의 특공대가 호위기들과 함께 출격해.

(참고로 이 호위기들중에는 혼자서 약 120기의 연합군기를 격추한 슈퍼 에이스, 니시자와 히로요시도 있었다.)

이들은 미군 항모 부대를 발견하는데 성공하였고 작전을 개시해.

특공기들은 호위하는 구축함들을 저공으로 돌파한 뒤에 급상승해.

미군 함재기들을 이들을 막으려고 시도했지만, 특공기들은 호위기의 도움을 받아 급강하 폭격 고도에 진입하는데 성공해. (대충 폭격 가능한 고도라고 이해해라.)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미 함대의 수병들은 곧이어 경악을 금치 못하게 돼.

일본기들이 급강하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항모에 돌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바로 가미카제의 존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최초의 순간이야.

잠시후 일본군 사령부에게 호위기로부터 다음의 보고가 수신되

"항모 1척에 2기 명중, 격침 확실! 다른 항모 1척에 1기 명중, 대화재!, 경순양함 1척 격침!"

실제 전과는 호위 항모 1척 격침, 호위 항모 1척 대파로, 호위기의 보고에는 약간 못미쳐.

근데 그게 중요하냐? 중요한건 유효한 타격을 드디어 입혔다는거야.

필리핀 해 해전을 비롯한 그동안의 전투에서 수백 기가 넘는 일본기들이 못했던 것을 단 5기의 전투기들이 이루어냈다는 거지.

이 소식이 일본 본토에 전해지자, 일본 언론들은 특공대의 투혼에 열광하여 대서특필하였고, 이것은 마치 하나의 붐처럼 이어지게 돼.

특공대의 성공을 두 눈으로 확인한 일본군 수뇌부는 지금까지 정신나간 소리로 치부해왔던 가미카제를 전면적으로 채택할 것을 진지하게 검토해.

이후로 미 함대에 맞서는 일본군의 주력은 통상 공격을 하는 항공대도, 야마ㅌㅗ 같은 거대 전함도 아닌 바로 가미카제였어. (야마ㅌㅗ 왜 금지어냐? ㅅㅂ)

아예 가미카제가 주가 되는 작전마저 있었지. (약 1,900여기의 가미카제가 투입된 기쿠스이 작전을 말한다.)

이렇게 국가 주도적으로 가미카제를 운용한 일본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2,800여기의 가미카제를 투입하여 연합군의 함정 34척을 격침시키고, 368척에 크고 작은 피해를 줬으며, 약 10,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안겨주었어. (솔직히 실감이 잘안될거야. 그러려니 하도록.)

가미카제의 명중률은 약 14%로 추산되는데, 앞서 말했듯이 필리핀 해 해전처럼 수백 기의 항공기를 동원하고도 전과를 거의 낼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수치는 대단히 경이로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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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키 대위의 가미카제가 호위 항모 세인트 로에 명중한 모습을 담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가미카제의 진실

지금까지 가미카제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이야기했어.

기억이 날 게이가 있기는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글의 도입부에 3가지 의문점들을 제시하고, 그 의문점을 해소하는 것이 이 글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했었지.

그 의문점들을 다시 복붙해오자면,

'일본군은 왜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했을까?, 그리고 일본 스스로는 이 방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또한 이러한 가미카제는 실제 전황에 있어서 주효하게 작용하였을까?'

이거지.

이제 하나하나 대답해주려고 해.

먼저 첫 째, '일본군은 어째서 이러한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야 했냐?'야.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금까지의 글에서 충분한 설명이 되었을거라고 생각해.

따라서 질문을 살짝 바꿔서 '일본은 반드시 이러한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했나?'에 대한 답변을 하는 편이 나을거라고 봐.

단도직입적으로 동원할 필요 없었어. 필요한 것은 가미카제 따위가 아니라 항복이었지.

정상적인 사고 방식을 지닌 국가라면, 패전이 확정된 필리핀 해 해전 이후에 항복하는게 맞아.

그럼에도 일본이 답 없는 전쟁을 지속한 이유는 군 수뇌부의 다분히 이기적인 자존심과 욕심 때문이었어.

수뇌부는 최대한 시간을 끌다보면 미군을 지치게 만들고, 어떻게 조건부 항복이라도 얻어낼 수 없겠느냐라는 근거없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럼으로써 전범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전쟁을 지속한거야.

죽어가는 병사와 국민들은 이미 그들의 계산 밖에 있었던거지.

두 번째로, '일본군 스스로는 이 방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야.

사실 최초의 가미카제가 등장하기 전부터 가미카제에 대한 건의는 꾸준히 있었다고 해. 졸전을 견디지 못한 일본군 조종사들이 스스로 상부에 의견을 낸 것이지.

처음에는 지휘부는 이 무식한 전술에 회의감을 품고 허락하지 않았어.

하지만 최초의 가미카제가 이루어 낸 성공을 보게되자 입장을 바꾸고 아예 주도적으로 운용을 계획하지.

처음에는 많은 수의 조종사들이 적에 대한 분노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끓는 피를 주체 못하고 자원했다고 해.

그러나 지휘부는 갈수록 많은 수의 가미카제 대원들을 요구하게 되었고, 점차 본질이 변하여 조종사들이 반강제적으로 자원을 강요받기에 이르러.

당여하지만 일본인 모두가 가미카제를 지지했던 것은 아니야.

일본 해군의 마지막 총 사령관이었던 오자와 제독(전편에서 나온 그 오자와 맞다. 승진했노? 하지만 일본 해군에 남은 것은 다쓰러져가는 함대..),

슈퍼 에이스 파일럿인 사카이 사부로 등의 신념있는 사람들은 가미카제를 노골적으로 비난해.

사카이 사부로의 경우는 가미카제를 명령 받고 출격하지만, 거부감을 느끼고 이끄는 부하들과 함께 생존 귀환한 일화도 유명하지.

일본군 지휘부도 이들한테 함부로 뭐라고 하지는 못하지. 군에서 명망이 높은 사람이기도 했고, 스스로도 가미카제의 부정당을 알고 있었으니까..

즉, 많은 사람들이 가미카제에 대해 회의감을 품고 있었어. 가미카제의 창시자인 오니시 제독 마저 유서를 통해 가미카제에 대한 반성의 마음을 깊히 드러내지.

사실이 이러한데, 21세기 우리 옆나라 일본은 가미카제를 자랑스러운 역사라하여 유네스코 등재를 신청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

독일이 2차 대전 당시 히틀러 유켄트를 국가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애국지사라면서 유네스코 등재를 신청하면 어떨까?

이것은 명확한 역사 왜곡이야.

(히틀러 유켄트는 나치 독일군이 전쟁 말기에 운용한 청소년 부대다. 궁금한 게이 있을까봐 씀.)

청년 시절에 태평양 전쟁을 직접 겪었던 요미우리 신문 그룹의 와타나베 츠네오 전 회장은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해.

"그들이 용기와 기쁨에 차서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떠났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들은 도살장의 양들이었다. 모두 눈을 내리깔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서 있을 수 조차 없었고, 유지군들에게 운반되어 비행기 안에 밀어 넣어졌다."

이것이 바로 가미카제의 진짜 모습인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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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미카제 대원들의 사진. 이들의 인간적인 모습이 마음을 착잡하게 만든다. ㅠㅠ

마지막으로 세 번째, '가미카제는 실제 전황에 있어서 주효하게 작용했나?'야. 이 문제는 전쟁을 지속한다는 전제 하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위 첫 번째 논제와는 다른 이야기야. 오해 ㄴㄴ하도록.

사실 여기서 많은 게이들의 반발이 심하지 않을까 생각해. 의외로 가미카제는 효율적인 전술이었거든. (벌써 부들부들하는 게이들 있을듯. ㅠㅠ)

오해하지말고 일단 읽어보고 판단해줘. 지금부터 설명해줄게.

일단 가미카제는 확실히 미군에게 크나큰 위협으로 급부상했어.

가미카제가 등장하기 전만 해도 전무한 피해로 어렵지 않게 일본 공격기들을 분쇄했던 미군은 가미카제가 등장하자 어느 때보다 고전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미카제에 의한 피해는 빠른 속도로 불어났고, 미군 지휘부는 군의 사기가 저하될까 염려하여 가미카제에 대한 피해를 극비 사항으로 취급하지.

가미카제가 위협이 되지 않았으면 미군의 이러한 움직임을 이해할 수 없어.

그럼에도 많은 게이들이 가미카제의 효율성(?)을 의심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어.

'차라리 가미카제 말고, 통상 공격을 지속했으면 살 사람은 계속 살아남아서 숙련도가 올라가는거 아니냐? 가미카제는 그나마 남아있는 숙련된 조종사 마저 사지로 몰고 간 거 아니노?'

물론 나는 역사에 있어서 가정을 기반으로하는 논제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해.

때문에 여기서는 내 생각을 말해볼게.

내 생각에는 일본군 입장에서 가미카제는 미 함대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거야.

몇 차례 언급했듯, 통상적인 공격으로는 미 함대를 구경하기도 전에 미군 함재기들에게 요격당해 격추되어 갔던 초보 조종사들이,

가미카제로 무려 약 14%에 달하는 명중률을 기록했으니까. (14%가 실감이 잘안난다면 필리핀 해 해전을 생각해봐. 어마어마한 수치지?)

또한 일본군은 가미카제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통상 공격도 가미카제와 함께 병행했어.

주로 기존에 남아있던 숙련된 조종사들이 통상 공격을 맡았는데, 가미카제가 미군 함재기의 요격을 상당 부분 빨아들이자 상대적으로 유능한 이들이 공격을 성공시킬 확률 또한 늘어났지.

일본군도 최소한의 생각은 있었기에, 유능한 조종사들에 한해서는 대체로 가미카제 공격을 엄금했어. 이들을 훗날 통상 공격 작전에 투입하기 위함이지.

또한 가미카제와 통상 공격은 똑같이 명중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유의미한 파괴력의 차이가 있었어.

적함과 접촉시 폭발하는 통상 공격과는 다르게 가미카제는 기체가 적함에 격돌하면, 폭탄이 그 충격으로 분리되어 함내로 뚫고 들어가 폭발하는 경우가 많았지.

(이 부분은 사실 그렇게 비중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설명을 보충하고자 이야기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어디까지나 미 함대에 피해를 입힌다는 목표에 있어서) 가미카제 공격이 통상 공격을 지속했을 경우보다 효율성이 훨씬 높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진다고 생각해.

가미카제가 없었으면 미 함대의 앞길을 막을 것은 사실 전무하다고 생각하면 돼.

만약 그랬다면 미 항모 부대는 진작에 도쿄 만에 눌러앉아 밥 먹듯 일본 본토를 농락할 수도 있었고, 그로 인해 종전은 더욱 빨라졌을거야.

그리고 이 견해는 많은 전문가들과 공통된 생각이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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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11월 25일, 가미카제가 항모 인트레피드에 작렬하기 직전에 찍힌 순간포착 사진이야.

저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저 수병은 오줌 지렸겠지?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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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5월 11일, 오키나와 근해에서 가미카제 공격으로 대화재가 발생한 항모 벙커 힐의 모습이야.

이 항모는 지옥을 왔다갔다하다가 겨우겨우 살아남는다.

가미카제에 관한 비참한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해.

수많은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이 어긋난 우국충정 아래 무의미하게 낙화했지..

나는 사실 이들이야말로 전쟁의 제일 큰(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해.

세뇌되어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출격했던지, 강제적으로 조종석에 올랐던지 말이야.

여하튼 두 번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전쟁의 참극이 아닐 수가 없지....

글은 여기서 마무리하려고 해.

게이들이 살짝 어렵진 않았을까 걱정이다.

그리고 궁금한 점 있으면 적극적으로 어그로 끌어줘.

최대한 다 답변해줄테니까.

긴 글 읽어줘서 고맙다.

# 글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

위키 백과 (http://en.wikipedia.org)

대사의 태평양 전쟁 이야기 (http://blog.naver.com/imkcs0425)?

World War II Database (http://ww2db.com)

구글 이미지 검색 (http://www.google.co.kr/imghp)?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박재석 저, 가람기획)